2024년 2월 라브리 소식편지
지난 겨울 학기 동안 양양은 비교적 따뜻했으나 몇 주간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보일러 난방 순환 펌프가 혹한에 버거웠는지 세 개나 교체했습니다. 눈도 많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열흘 사이에 온 눈은 약 1m에 이르며, 며칠 동안 녹아도 라브리 마당에는 아직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들을 먹이고 재우고 돕다 보니, 어느덧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겨울 동안 늘 함께해 주신 우리 주님과 기도와 헌금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기도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에 식사 봉사를 하러 오신 용감한 광식, 남정 집사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조용히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준 혜진이에게도 감사합니다. 세 분의 충성스러운 헬퍼들이 없었으면, 아마 학기 중간에 문을 닫았을지 모릅니다.
국내만 아니라, 싱가포르와 아르헨티나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반가웠습니다. 그들 앞에서 추위와 눈 폭탄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인생이 권태로워서 쉬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진리에 목이 타거나 울고 있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을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 생각해 보니 오래 전에 정원씨가 말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손님들의 질문 하나하나가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요즘 학생들의 말로는“꿀잼”이었습니다. 밥상과 티타임만 아니라, 성경 읽기 시간에 쏟아져 나온 질문과 토론은, 마치 바울 사도가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난파선에 탔던 276명의 말처럼, 여러 가지 믿음과 철학이 깔려 있었습니다. 기도 편지에서 그것을 다 나눌 수 없으나, 몇 가지 중요한 신념들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나는 운명을 믿는다.”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바울 사도의 난파선에 탄 사람들 중에 “사공들” 혹은 “선원들”은 처음에는 배가 난파되지 않도록 적어도 온갖 예방조치를 다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배가 난파될 위기에 빠지자,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내리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사도행전 27:30)
아무런 대책도 없이 폭풍 가운데 작은 보트에 자기 목숨을 맡기는 사람들은“살면 살고, 아니면 말고!”, “모든 것은 내 운명이고 내 팔자(八字)야.”“모든 것은 신의 뜻이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는 삶같이 보이지만, 무책임하고‘자살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운명론에 잘 빠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바꾸기에는 사회 구조나 자연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비참한 자기 현실을 운명이나 초월적인 신의 장난에 맡기면 잠시라도 어려운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결과가 안 좋을 때 자신을 정당화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도 운명론자였습니다. “내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자기 자신의 실존의 중심을 잡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그 태도가 바로 아모르파티 (Amor Fati)이다.”
둘째, “나는 자유의지를 믿는다.”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난파선의 운전키를 맡았던 “선장과 선주”는 바울 사도가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27:9)하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위태하다”라는 말은 ‘안전하거나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나 위험에 시달린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불확실하고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판단력이나 황제의 약속을 믿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겨울에도 곡물을 공급하는 선주들에게는 특별 상금을 준다.”라는 황제의 약속이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판단이 다 옳지도 않고, 다음에는 무슨 선택을 할지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자기의 선택을 믿고 자기의 의지를 믿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 의지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내 인생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거야.”라는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론에 빠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운명론과 숙명론에 자기를 맡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 외부적인 간섭이나 결정에 따라서 살기보다는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으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 만약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라면,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누구에게 의존적으로 사는 것보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 로크, 데카르트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은 사람입니다. 흄(David Hume)이라는 서양 철학자는 “자유의지는 단순히 자기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힘이다. 즉,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로 선택하면 쉴 수 있다. 우리가 이사 하기로 결정하면 이사할 수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도덕적 책임을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필요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셋째, “나는 운명도 믿고 자유의지도 믿는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난파선에 탄 사람들 중에“백부장”은 양다리를 걸치고 왔다 갔다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부장”은 배가 시돈 항에 잠시 들렸을 때는 바울 사도에게 친구들을 만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27:3) 그러나 그는 바울이 겨울 바다가 위험하니 미항 (Fair Havens)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말했을 때는, 바울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27:11) 그러다가 배가 난파된 후에는, 그는 바울을 구하기 위해 모든 죄수를 풀어주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거나, 모호하고, 불확실하거나, 상대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거나 잘 살아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내 운명도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결정도 믿는다” “어떤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어떤 것은 우리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은 양립이 가능하다.’라고 믿는데, 그것을 순진한 양립가능론을 믿는 사람들 혹은 호환론을 믿는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이런 생각이 인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 상황과 조건에 따라 시시때때로 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단정하기 곤란하거나,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모호성과 임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 양극단도 피할 수 있고, 원수도 덜 만들 수 있는 중간(中間)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공자님이 말한 중용(中庸), 부처님이 말한 중정(中正),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립(中立)이란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양립가능론자였을 것이라 말합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아요. 내 과학적 성과는 틀림없이 정해져 있었어요.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유명한 말로 ‘양자역학’의 세계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결정론자도 아니고 자유의지론자도 아니고 모호합니다.
넷째,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7:23, 24) 동시에 그들은 성장과 선주와 백부장에게 선택을 잘못하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확실히 경고하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27:10)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27:18)
- 바울 사도는 죄수의 신분으로 군인들에게 호송되어 가는 처지였지만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세 번 이상 위로했습니다. (27:22, 27-32, 33-38)
- 누가는“우리가”(27:16-18)라는 말을 볼 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한 것만 아니라 선원들이 하는 위험한 일도 같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크레데 가우다섬 (island of Cauda, Clauda)에 있는 작은 항구에서 선원들이 구명정을 잡아 올리고 고정하는 일을 할 때, 아리스다고와 같이 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 아리스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데살로니가의 귀족 출신으로서 바울 사도의 종노릇 혹은 비서 일을 한 것은,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 “심히 애쓰고.”(27:18)라는 말을 보면, 타니힐 (Tannehill)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목적 실현에 크게 이바지했다.”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도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잘 보여주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잘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 되니라”(27:44)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100% 믿으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100%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팀 켈러의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균형을 보여주었다. 주님은 바울을 격려하시면서 한 사람도 죽지 않도록 모든 생명을 구하셨다. 바울과 그를 포함한 276명은 부서진 배를 떠나 모두 땅으로 수영하여 나왔다. 그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라브리 뒷산 계곡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겨울에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도 구원과 성령의 강물이 계속 흘러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몇 가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우리 국민들과 기독교인들이 마치 난파선을 탄 것 같은 오늘날의 선거와 전쟁과 혼란 앞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바른 신념과 고요한 심령으로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간사들의 부족으로, 올봄에도 매주 토요일 - 화요일만 라브리를 개방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라브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고, 간사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잘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영동극동방송 양양지역위원회 회원 약 15명이 기도회로 모였고, 이번 주말에는 하늘을담은교회 청년들이 다녀갑니다.
- 요즘은 매주 주일 오후 2시에 라브리에서 가까운‘정다운마을’에서 연합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들과 채플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음성을 잘 듣는 예배를 드리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맞아, 지난 주부터‘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2월 25일
양양에서 인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