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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라브리 소식편지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 미사일 발사, 진도 여객선 참사, 지하철 충돌 등으로 인해 온 국민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도 여객선 참사는 갑자기 당한 비극이라 충격도 크지만 정부의 속수무책 앞에서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손에 맥이 풀리고 무릎이 떨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 외상적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이번 참사에 직접 관계된 사람들만 아니라 온 국민의 마음에 분노와 실망이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천하보다 귀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소비 위축으로 나라 경제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환경적으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진도 앞바다가 “통곡의 바다”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는 부활절을 잊어버릴 정도로 우리 모두의 가슴과 영혼에서 기쁨과 웃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정부와 해경과 같은 조직이 안전사고에 속수무책이라는 것이 노출된 것입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으므로 조만간 종합적 분석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세월호 선원들과 선주의 무책임, 그리고 불법 관행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재난 대처법 혹은 위기 관리법에 대해서도 국가적인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손에 맥이 풀리고 무릎이 떨릴 정도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다시 새 힘을 얻고 어서 속히 일어서야 합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국가적인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 속에는 깊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첫째는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은 아무 까닭 없이 신은 고난을 허락하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아들 딸 10명을 잃고 황망한 나날을 보낸 구약의 욥(Job)이란 사람의 질문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2014년의 잔인한 봄을 사는 모든 한국인들의 질문이나 극도의 고난을 당한 욥의 질문이 같은 것이라는 점이 참으로 묘합니다.

“...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욥기 21:6-13)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욥기 9:17-18) 사실 욥이 제기한 질문도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무질서한 세계(disorderliness of the world)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비도덕성(viciousness of God)에 관한 것”(현창학)이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욥기에는 여러 가지 거짓 위로와 대답들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1)경험주의/“너도 한 번 나처럼 해 봐라.”(엘리바스) 2)전통주의/“선배나 조상들한테 한 수 배워라.”(빌닷) 3)율법주의/“율법에 비추어 흠이 없나 보라.”(소발) 4)합리주의/“너는 내 논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엘리후) 5)주관주의/“나도 내 주장을 하고 싶다.”(욥) 이런 대답이 거짓 위로였다면, 과연 욥기에서 주어진 참된 위로와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찾은 다섯 가지 중에 앞의 두 가지는 욥기의 직접적인 대답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제가 욥기에서 배운 간접적인 지혜입니다.

첫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을지 모르니 입을 조심하세요. 욥이 첫 번째 던진 질문, 즉 왜 세상에는 악한 놈들은 잘 되고 착한 사람들은 고생하는가와 같은 ‘무질서한 세계’에 관해 “하나님은 깊은 계획(에차, echa)이 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에차(echa)”라는 말은 ‘설계’, ‘계획’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잘 사는데 반해 선한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 같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욥기는 1)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지어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튼 소리를 해대며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에차)’을 흩어 놓으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욥기 38:2, 현대어) 2)하나님이 세계를 운영하는 방식도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가 없으며, 탐지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기원(욥기 38:4-15), 우주의 섭리(욥기 38:16-40:2), 동물의 생태(욥기 38:39-39:30)에 대해 약간의 파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 때와 열 때를 구분해야 합니다. 욥도 처음에는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도 함부로 떠들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나르시스적인 자기도취에 빠진 발언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욥기 32:17) ‘나도 이 분야에서는 전문가이므로 하고 싶은 말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인데,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는 교만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과 그 분의 심오한 뜻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맙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오나 다시는 더 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욥기 40:4,5) 욥은 입을 가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다시는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깊고 위대한 계획을 잘 모르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면 우리의 무식을 세상에 폭로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과 압도적인 경륜을 듣고는 침묵하지 마세요. ‘아무 까닭 없이 신은 고난을 허락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가진 욥은 하나님을 “범죄자”로 취급한 적이 있습니다.(욥기 40:8-12) “범죄자다.”란 말은 ‘하나님은 인간들이 고생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악마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거나, ‘하나님은 악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와 경륜(미쉬파트, mishpat)’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낚싯대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잡기는커녕 보기만 해도 낙담하지 않겠느냐?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욥기 41:1-11)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체밧(M. Tsevat)은 하나님의 이런 접근 방법을 일컬어 “압도의 교육(education of overwhelming)”이라고 불렀는데, 하마와 악어, 공용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시므로 자신의 초월적인 능력과 자연을 섭리하는 경륜 앞에서 욥이 압도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비극을 맛본 사람은 찻숟가락 정도의 위로만으로도 치유가 됩니다. 그러나 큰 비극에 놀란 사람은 바다 같은 위로가 아니면 치유가 안 됩니다. 욥도 처음에 하나님이 점잖게 접근했을 때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다가 “하마”와 “악어”(40:15-24, 41:1-34)라는 "두 괴물"을 등장시켜 바로 ‘그 괴물을 통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을 때에야 굴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폼을 잡으신 이유는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상처받고 교만한 인간이 하나님의 따뜻하심만이 아니라 위대하심을 듣고 위로받고 대답을 찾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이런 경이와 경륜을 듣고는 입이 열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도다.”(욥기 42:3)라고 소리쳤습니다. 욥은 자기가 오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부도덕한 신’도 ’악마’도 아니며, 오히려 세계 질서의 주권자요, 공의(公義)의 집행자이시며, 전능자이며, 선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말도 벙긋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신비와 경륜에 압도당한 후에는 욥은 그를 찬양하고 과시했습니다. 우리도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다 모르지만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과 경륜을 보게 되거든 턱이 빠질 정도로 큰 소리를 칩시다.

셋째, 힘들 때는 울고 화내고 욕 좀 하도록 내버려 둡시다. 이번에 우리는 많이 울기도 했고 화도 냈고 욕도 했습니다. 길을 가다고도 탄식했고, 밥상을 받아놓고도 탄식했고, 친구를 만나도 탄식했습니다. 실컷 좀 울도록 내버려 둡시다.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처럼, 울어야 할 때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슬픔을 빨리 극복합니다. 특히 세월호가 허무하게 가라앉던 그날 밤부터 우리는 대통령과 해경과 선장에게 화도 냈고 험악한 욕설도 많이 퍼부었습니다.

욕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싱어송 라이터 이길승씨가 말했듯이, 욕은 친구들 사이나 혹은 친밀한 사람들 끼리나 가족 사이에 허물없이 주고받는 “사랑과 축복 그리고 우정의 암호”입니다. 그리고 욕은 한 사회의 도덕성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또한 욕은 큰 기대가 무너졌을 때 터져 나오는 비난과 좌절의 한숨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많이 쏟아낸 욕은 조난 신호이기도 합니다. “나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나를 제발 도와주세요.” “내말 좀 들어주세요.”라는 마지막 조난 신호(SOS) 말입니다.

루이스(C. S. Lewis)는 자기 아내를 잃고 난 후에 하나님을 “생체해부자.”라고 욕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욥은 한 때 하나님을 “잔인한 신”, “범죄자”라고 욕한 사람입니다.(욥기 3:23-26; 6:1-3, 7:11-21; 10:1-22; 13:17-28; 16:6-17; 19:1-12; 30:1-31; 40:8-12)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조난 신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욥의 욕 중에 몇 가지 압권이 있습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돌팔이 의사)이니라.”(욥기 13:4)
“너희는 모두 고통스러운 위로자로구나.”(욥기 16:2)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혹은 개만도 못한 자)들이니라.”(욥기 30:1)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욥기 30:8)

넷째, 어지러운 때일수록 자기 주장만 하기보다 정직하게 토론하는 법을 배웁시다. 이번에 우리는 얼마나 말, 말, 말이 많은 언어학적 민족인지를 실감했습니다. 고함, 스마트폰 통화, 문자, SNS, 카톡, TV 실시간 보도, 인터뷰, 대책회의, 반대집회, 항의소동 등 말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이번 일로 자기주장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서로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여 구조가 지연된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자기 말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욥기 32:17)는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하물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욥도 친구들이 “악인은 무조건 패망 한다.”와 같은 말을 “거짓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욥기 21:34)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자기만 옳다는 확신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제외한 욥의 세 친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기 42:7,8)고 한 것을 보면, 욥의 주장은 어느 정도 상대적 정당성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한 말이 모두 다 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정당성은 절대적 정당성과 다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주장이 틀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주장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도 욥의 말을 무조건 다 옳다고 받아들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기 40:14)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잘못을 회개하면 내가 인정하리라.”는 말입니다. 욥의 말은 정당성이 있는 것이 많았지만 실수와 오류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초월자를 만나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자기가 초월자인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욥은 “정직한 변론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자신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과의 변론을 신청했습니다.(욥기 23:7) 문제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때일수록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설득할 수 있도록 정직하게 토론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조심합시다. 요즘 많이 들리는 말처럼 “죄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속지 맙시다. 욥의 나쁜 친구들은 “고난은 죄의 결과 혹은 죄 값”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치를 떨 노릇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로마서 2:3)라는 말씀이나, 욥이 고난 중에 찾은 것처럼 ‘죄 값은 치러야 하지만 모든 고난은 죄 값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죄 값대로 처벌을 받는다면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클라인스(D. J. A. Clines)가 잘 지적한 것처럼, “보응의 원리를 적용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그 원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즉 ‘보응의 법칙’ 혹은 ‘인과율의 법칙’은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보편 원칙이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므로 보응의 원리를 일괄적이거나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2)보응의 법칙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며, 그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정의와 함께 작동하는 신적 도덕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응의 법칙을 실행해야 하지만 사랑으로 그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보응의 법칙을 강조하려면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정의도 같이 강조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은 죄 값을 제대로 묻는다면 죽음이나 사형으로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과 정의를 생각하여 서로 용서받고 용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은 죄 값이다.”는 말도 조심해야 하지만 “죄 값대로 처벌하자.”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도 말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기 좋은 때일수록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욥기에 대한 자세한 글을 보시기 원하면 라브리 홈페이지 자료실(www.labri.kr)에서 ‘회의주의’란 제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2014년 5월 현재 한국 땅에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고, 숨어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 곁에 항상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우리 곁에 계십니다. 고통이 우리를 삼킬 듯이 덤빌 때에 미성숙한 성도처럼 흔들리거나 떨고 서 있지 말고 우리 앞에 서신 대장부 예수님처럼 허리를 묶고 손에 힘을 주고 무릎을 다시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 와중에 라브리에 찾아오는 청년들과 그들을 위로하기 바쁜 간사들을 위해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2014년 5월 1일

성인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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