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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라브리 소식편지

존경하는 라브리 기도가족에게 올립니다.

오늘은 양양에도 아침부터 장마 비가 오락가락 했습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에는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소나기를 손님들이 갖고 온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더운 날에는 소나기가 제일 반가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손님들이 많이 다녀가고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서 여러분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아침에는 이단에 빠졌던 한 대학생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사람들을 라브리로 보내주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믿지만, 그 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단으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교리적으로 바로 잡는 일은 몸살이 날 정도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각오를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난 6월 13일 월요일 저녁에는 이곳 양양 산골짜기에서 6개국 청년들이 한 자리에 앉아 기도회를 가지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3월의 10개국 청년들의 방문에 이어, 일본, 영국, 캐나다, 중국, 아르헨티나에서 온 청년들이 한국 청년들과 함께 한 자리에 앉아 같이 기도한 시간은 우리도 기뻤고 주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탈북 청년 10 여 명이 라브리를 방문하여 주일 예배도 같이 드리고 세계관 강의도 듣고 갔습니다. 남한에서 잘 적응하고 예수님도 잘 믿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40대에 두 번째 사춘기를 겪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몇 주 동안은 40-50대 장년들이 장래 문제를 갖고 와서 많은 고민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한 부부는 이혼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돌아갔고, 다른 한 부부는 신앙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작정하고 돌아갔습니다. 한 40대 청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돌아갔습니다. 이 땅의 고민하는 40-50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간사 4명이 내려와서 라브리 간사들과 연석회의를 갖고 내년 1월에도 기독교세계관학교를 다시 개최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현대 사상과 이단들이 믿음이 좋은 청년들까지 흔들어대는 영적 혼돈 시대에, 신앙과 지성의 기초를 튼튼히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줄리아는 아신대 상담학 석사과정에 합격하였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라브리에 머물며 헬퍼로 수고할 예정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무척 즐기고 있는 삼원 간사는 지난 두 달 동안 매우 바쁘게 보냈습니다. 멀지 않아 라브리 살림살이도 많이 맡고 손님들도 잘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삼손만큼이나 머리카락이 길어진 충성 간사는 캐나다로 돌아간 진성 간사의 차를 한 대 얻어서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채플 설교를 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간사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여름이 되면, 저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라브리를 다녀가도록 하고 싶지만 간사들과 가족들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늘 사역욕심과 가족사랑 사이에서 두 마음이 교차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사도행전을 공부하다가 성령께서 바울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만류하신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성령께서도 두 마음이 교차할 때가 계시는 것을 발견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분명히 바울 사도는 “성령에 매여”(사도행전 20:22)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에베소와 두로에서는 성령에 감동한 제자들이 만류했고(사도행전 21:1-4), 가이샤라에서는 성령에 충만했던 예언자들이 강력하게 만류했습니다.(사도행전 21:8-14) 한 편으로는 성령께서 바울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강력하게 만류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 성령께서 두 가지 일을 대립적으로 혹은 더블플레이를 하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여기에 대해 존 스토트(John Stott)는 둘 다 성령의 일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 방문 결정과 제자들의 만류는 둘 다 성령의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나 ‘성령에 감동’한 제자들이나 빌립의 딸들이 가지 말라고 한 것은 모두 ‘성령 안에서’ 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둘 다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과연 성령은 더블플레이 전문가이거나 이중인격자라서 그럴까요? 아마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한 성령께서 서로 대립적이고 이중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실까요? 저는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성령께서 바울 사도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인격적 갈등의 한 양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령께서는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바울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고 그가 받을 고난이 근심이 되었기 때문에 만류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성령께서 바울 사도의 자발적인 선택과 거기에 따르는 고난을 존중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울 사도가 굳이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되지만, 예루살렘 교회와의 화해를 위해 기어코 가겠다고 하는 자발적 선택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고난이 걱정이 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만류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마음이 교차 하는 이런 현상은 인격적이신 성령께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 자신에게도 선교추진과 개인안위 사이에서 중대한 결단이 필요할 만큼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2-24)

그리고 이런 마음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나 우리들에게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면서도 건강이 염려가 되어 “일찍 자거라.”고 당부 하실 때 생기는 현상이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자식들에게 “잘 했다.”고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굳이 네가 그런 고생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는 것과 같은 현상 말입니다. 모두 지극한 사랑과 자발적 선택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타나는 이중성입니다.

여러분은 업무욕심과 개인사랑 사이에서, 선교사명과 가족사랑 사이에서 이런 실존적인 고민을 할 때가 없습니까? 그 때는 먼저 그런 두 마음의 교차를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마음에 평화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바울처럼 자발적인 고난을 선택할 때는 고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대가 때문에 힘이 들겠지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7월 1일

인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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